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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이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는 바꿀 수 없는 사실이고, 기록이며, 정체성이자 미래를 설계하는 기준점이다. 20세기 초 열강은 제국주의라는 희대의 광기에 휩싸여 전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었고, 그 원흉이 된 몇몇 국가들은 인륜이라는 기본적인 양심을 저버린 만행을 저질렀다. 시간이 흘러 한 나라는 과거에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인정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을 택했고 어디 멀리 붙어있지 않은 섬나라는 똑같은 (어찌 보면 더 악랄한) 짓을 저질렀어도 과거를 부정하고 심지어 벌어진 일을 왜곡하며 은폐하려 한다.

가해자들의 대조된 태도를 보는 건 그렇다 치자. 그건 어쨌거나 그들 스스로가 당면한 입장이니까. 그렇다면 피해자의 입장은 어때야 할까? 한국은 일제 치하에서 35년 간 식민지의 설움을 맛보았다. 이건 한국이라는 나라의 역사상 가장 특수한 시기이자 정체성을 부정당했던 굴욕적인 시기였다. 강제징용이나 인체실험 등 수많은 악행들에 더해 종군위안부처럼 약자에 대해 무자비한 착취가 이뤄진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이 사실에 분노하고 내 일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알다시피 최근 한국의 교육에는 역사가 없다. 3.1 운동, 심지어 6.25가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피해자들이 정작 자신들의 처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름없다. 위안부 문제를 피해를 당한 일부 여성 당사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착각이다.

[소녀이야기]는 이러한 작금의 참담한 역사의식에 잔잔한 울림을 주는 애니메이션이다. 김준기 감독이 청강문화산업대학교의 아티스트레지던스 프로그램[각주:1]을 통해 콘텐츠스쿨 학생들과 함께 완성시킨 이 작품은 10여 분 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위안부 피해자인 故 정서운 할머니의 생전 인터뷰 육성을 내레이션으로 깔고 이를 바탕으로 상황을 구성해 가는 일종의 다큐멘터리다.

ⓒ 청강문화산업대학교. All rights reserved.

일본군에게 협조하길 거절했다가 주재소에 갇힌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2, 3년만 일하면 아버지를 풀어주겠다는 동네 이장의 감언이설에 속아 위안부로 끌려간 15살의 소녀. [소녀이야기]는 그녀가 무려 8년 간 인도네시아의 외딴 곳에서 성노예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를 가슴 찡하게 담아냈다. (사실 위안부라는 단어 자체가 가해자의 시선을 담은 미화적 표현이라 엄밀히 말하자면 성노예가 맞다) 가해자가 주장하는 '위안부 여성은 자발적었다'는 망언의 그 '자발적'이라는 의미가 이 작품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성의식에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한 15세의 소녀가 낯선 곳에 끌려가 능욕당하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개, 돼지는 그럴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사람은 그래선 안 된다. 매우 민감한 문제인데다 피해 당사자에겐 트라우마의 유발을, 또 한편으로 성적 학대에 대한 표현 자체가 자칫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소지가 크기 때문에 [소녀이야기]에서는 이러한 피해의 현장을 최대한 순화시켜서 표현했음에도 당시 받았을 소녀의 충격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 청강문화산업대학교. All rights reserved.

연출을 맡은 김준기 감독이 이 작품을 내놓으며 바란 건 관객이 '분노하기 보다는 제대로 알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이는 세월이 흘러감과 동시에 묻혀 버리길 바라는 가해자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크나큰 죄악에 대한 사죄는커녕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려 드는 시도에 맞선 가냘픈 소녀의 소리 없는 외침이자 무모한 싸움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가면 서서히 잊어간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지금은 시끄럽지만 시간이 흐르면 조용해지겠지'하는 뻔뻔스런 범죄자의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이는 것 같다. 한국 근대사의 해결되지 못한 숙제가 유독 많은 건 이러한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 청강문화산업대학교. All rights reserved.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작품임에도 [소녀이야기]의 완성도는 매우 뛰어나다. 10여 분 간의 러닝타임에 3년의 기간이 걸린 만큼 양보다 질을 택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육성과 자연스럽게 싱크가 이루어진 캐릭터의 입모양이나, 철저히 피해자의 관점에서 느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계산된 각 씬의 앵글 등 민감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에 담아내기 위해 김준기 감독과 청강대 콘텐츠스쿨 학생들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다행이 [소녀이야기]는 프랑스 안시의 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 출품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일본의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도 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의 카툰온베이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는 교육&사회이슈부문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또한 국내에서도 올해에만 KBS 독립영화관과 SBS 8시 뉴스를 통해 공중파로 방영이 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결국 진실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공감하게 되어 있다. 그 작은 노력들이 힘을 합쳐 언젠가는 이 무모한 싸움에서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소녀들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결말을 맺게 되길 희망한다.



*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단, 본문의 내용은 작성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1. 아티스트레지던스 프로그램: 국내외 유명 감독 등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전문 아티스트들이 1~2년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 상주하며 콘텐츠스쿨 학생들과 호흡을 맞춰 작품을 제작하는 프로그램.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아티스트들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 보다 집중할 수 있고, 학생들은 현장 전문가로부터 실무 기술 및 노하우를 익히는 동시에 작품 제작 경험도 쌓을 수 있다.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는 이기영, 김준기 감독 등의 아티스트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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