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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작열전(怪作列傳) No.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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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작열전 초기에 몇편 다룬적이 있습니다만 사실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흑역사를 돌이켜보면 아연실색할 작품들이 (한두편도 아니고) 더러있다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뭐 그렇다해도 저같은 30대 소년(?)들에겐 한때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요, 요즘 자라나는 신세대들이 본다면 어떤 느낌일는지 궁금합니다. 오랜만에 옛추억도 꺼내볼겸 오늘은 그 중 한편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1980년대 중반. 당시 한국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마지막 보루였던 김청기 감독이 홀로 창작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고군분투하던 시절, 하청업계의 범람과 극장수요의 감소 등으로 창작 애니메이션의 퀄리티가 바닥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나마 방학철만 되면 아이들에게 무수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 주었던 로봇 만화의 몰락이 예견된 해이기도 했지요.

그러던 와중 어린 관객들은 혜성처럼 등장한 '어떤 작품'의 출연에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김청기 사단으로 대표되던 로봇 애니메이션 시장에 불쑥 끼어든 [비디오 레인져 007]이란 작품 때문이었지요. [비디오 레인져 007]이 주목을 끈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퇴보를 거듭하던 기존 작품들과는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작화 퀄리티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비디오 레인져 007]의 오프닝 출격장면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비주얼이었는데요, 3D 처리된 로봇의 블록들이 합체되면서 프로그래밍 코드화면과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이전 어떤 작품들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화면의 경이'였습니다. 당시 극장에서 이 작품을 접한 초등학생들은 그저 침을 질질 흘리며 이 놀라운 작품의 완성도에 감탄을 연발할 수밖에 없었지요. 게다가 배경으로 깔린 BGM 또한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 대원씨아이(주). All Rights Reserved.

[비디오 레인져 007]의 출격장면. TV광고 등을 통해 선보인 이 시퀀스는 기존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경이로운 퀄리티를 보여주며 사람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스토리 역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유치한 감이 없진 않지만, 단선적인 구조가 아니라 한차례의 반전이 포함된 입체적인 구성이었으며 악당과의 대결 또한 단순히 치고 받는 수준에서 그치는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한차례 패배하기도 하며, 이를 로봇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해결한다는 점, 그리고 로봇을 조종하는 컴퓨터 인터페이스 방식 등 파격적인 패턴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비디오 레인져 007]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뛰어났던 퀄리티가 문제가 되었던 겁니다. 당시 국내 창작 애니메이션의 작화수준과 비교도 안될만큼 우수함을 보여주었던 [비디오 레인져 007]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성우 감독  -[혹성로보트 썬더A]에서 특수촬영을 담당- 이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만한 작품이 소리소문도 없이 기습적으로 개봉했다는 점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생겼던 겁니다.

ⓒ 대원씨아이(주). All Rights Reserved.

화면구도와 미장센, 그리고 작화의 세세한 디테일 부분은 세월이 흐른 지금 수준으로 보기에도 상당히 고퀄리티였음을 실감케 한다.


시간이 조금 흘러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진실은 생각 이상으로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1984년 3월. 토에이 사에서 제작한 [비디오전사 레자리온 (ビデオ戦士レザリオン)]이란 작품이 일본 TBS을 통해 방영되기 시작했는데요, 제작사인 토에이 측이 [비디오전사 레자리온](이하 레자리온)의 작화 하청을 맡긴 곳은 바로 한국의 '대원동화 (대원미디어의 전신)' 였습니다.

ⓒ Toei(東映) Animation. All Rights Reserved.

오리지널 작품인 [비디오전사 레자리온]. 토에이의 야심작이었던 이 작품의 동화는 당시 하청업을 주 업무로 삼았던 대원동화에서 담당했다.


당시 작화를 담당했던 하청팀은 [레자리온]의 원화 일부를 슈킹해서 원작의 에피소드 두어개를 짜집기해 극장 개봉을 단행하게 되는 실로 '대담한 범행'을 계획하는데요, 이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비디오 레인져 007]이었던 겁니다. 일전에 언급했던 [철인 007]이나 (왜이렇게 한국 사람들은 '007'에 집착하는 걸까요?) [달려라 마징가 X], [우주 흑기사] 처럼 디자인의 노골적인 표절이 문제가 된 적은 있지만 [비디오 레인져 007]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원화 자체를 그대로 도용했으니 말이지요.

결국 이 문제에 대해 토에이측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당시 일정수준의 캐릭터 표절 등에 대해서는 한국의 하청업무에 대한 무시못할 공헌도를 참작해 대부분 묵인해주던 것이 일본측의 관례였습니다만 이 사건만큼은 그 도덕적,법률적 책임의 수위가 한계를 넘었던 것이어서 토에이측에서도 강력한 클레임을 제기하게 되었고, 이로인해 [비디오 레인져 007]는 갑자기 상영을 중단하고 맙니다.[각주:1]

ⓒ Toei(東映) Animation. All Rights Reserved.


사실 [비디오 레인져 007]을 가만히 살펴보면 원화의 도용 외에도 여러 가지 면에서 심히 괴작스런 면이 발견됩니다. 왜 제목에 '비디오'가 들어가는지 전혀 설명이 안될뿐더러 (극중 로봇의 이름은 그냥 '레인져 007'임)[각주:2], 극중 '올리비아'의 아버지가 달에서 탈출하는 장면에서는 중간에 쓰러지고 난 다음의 이야기가 전혀 없으며, 애당초 '마치'가 왜 지구인이면서도 외계인에게 가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배경이 설명되지 않는 등 스토리에 있어서도 허술한 부분이 많습니다. 물론 이러한 허점은 앞뒤 고려하지 않고 원작의 에피소드 한두 개만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생긴 부조화이지만요.[각주:3]

이것만이 아니죠. 타이틀 로고에 쓰인 '007' 마저도 영화 [007]시리즈의 그것을 그대로 도용했으며, 또한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던 오프닝의 BGM 역시 실은 척 멘조니가 작곡한 [산체스의 아이들] OST와 장 미셀 자르의 'Equinoxe part 4'를 짬뽕한 무판권 BGM이었던 겁니다. (도대체 오리지널리티가 있긴 한거냐!)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디오 레인져 007 ⓒ 대원씨아이(주)/ Dr. No ⓒ 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디오 레인져 007]의 스폰서가 농심이었다는 것인데요, 그전에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PPL이 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납니다만 하여간 이 작품속에서는 농심 PPL을 극중에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는 특징이 있군요.

ⓒ 대원씨아이(주). All Rights Reserved.


어린이들에게 한때나마 한국에서도 이정도 수준의 애니메이션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무단 도용으로 창작 애니메이션 시장을 풍비박산낸 작품인 [비디오 레인져 007]에 대한 애증의 감정은 지금까지도 여러모로 저를 심란하게 합니다. 차라리 하청작업을 통해 쌓은 기술적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찌감치 일본과 손잡고 합작 애니메이션의 활로를 모색했더라면 이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요. 일부 어른들의 한탕주의에 의해 종말을 고해야만 했던 그 당시 어린이들의 추억은 누가 보상해 줄려나요.



* [비디오 레인져 007]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대원씨아이(주)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비디오전사 레자리온(ⓒ Toei(東映) Animation. All Rights Reserved.), 007 Dr. No(ⓒ 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1.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토에이 측에서 해당 사실을 보고받고도 향후 한국 시장을 잠식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를 묵과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비디오 레인져 007]이 관객들 사이에서 놀랄만한 퀄리티로 입소문을 타고 있음에도 서둘러 종영되었다는 점이나 이후 한국의 애니메이션 시장이 급속도로 냉각되었다는 점 등은 당시에도 이 작품의 저작권 침해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본문으로]
  2. 원작의 레자리온은 주인공이 만든 게임 프로그램이 물질전송 시스템의 실험중에 데이터가 뒤섞이면서 생겨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본문으로]
  3. [비디오 레인저 007]의 주적(主敵)인 자크 성인은 원작인 [레자리온]의 23화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전의 대립구도인 달 반란군 대 지구 방위군에서 자크성인과의 대결구도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에피소드를 가지고 각색했기 때문에 [비디오 레인져 007]에서는 이러한 배경설명이 상당부분 누락될 수 밖에 없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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