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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열전(續篇列傳) No.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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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무술의 의미는 단순한 국기(國技)를 넘어 민족적 자존심과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특히나 실존 무술인들을 조명한 일련의 무술영화들은 개화기 서구열강의 침입에 짓밟힌 자존심 저변에 깔린 저항의식을 나타내기도 하는데요, 일례로 정무문 창시자 곽원갑의 이야기를 다룬 [무인 곽원갑]이나 그의 제자 진진의 일화를 극화한 [정무문], 무영각(無影腳)의 달인 황비홍을 소재로 한 [황비홍] 등은 모두 외세에 굴하지 않는 무술인들의 긍지를 드러낸 작품입니다. 비록 관객들은 호쾌한 액션에 즐거워하겠지만 이러한 작품들의 공통점은 중화사상과 민족주의가 아주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소룡-성룡-이연걸로 이어지는 액션 스타들에 이어 뒤늦게 자리메김해가고 있는 견자단의 [엽문] 또한 앞서 언급한 작품들의 기본적인 컨셉에서 크게 벗어난 작품은 아닙니다. 한국에서는 '이소룡이 존경한 단 한사람'이라는 카피 타이틀로 홍보에 나섰지만 실제적으로 일제 강점기에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중국인들의 항일사상이 주 바탕이 된 작품이었지요.

[엽문]은 기존의 작품들이 가진 무술영화의 클리셰를 모두 갖고 있으면서도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과 절제된 미장센으로 중국 무술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영화로서 개봉당시 홍콩에서 2500만 달러의 엄청난 흥행수익을 거뒀습니다. 엽위신 감독과 견자단 콤비의 앙상블이 너무나 훌륭했던 덕분에 제작진은 급기야 [엽문]을 3부작으로 완성할 것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2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제자 이소룡과 스승 엽문의 인연이 등장하지 않을까 기대감을 품게 되었죠.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이소룡 역에 곽부성과 주걸륜 등이 물망에 올랐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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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darin Films LTD.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엽문 2]는 이소룡과 엽문의 일화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작품은 아닙니다. ('중점적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나중에 다시 다루도록 하죠) 그것보다 이번 속편에서는 전편에서 부상을 입고 홍콩으로 터전을 옮긴 엽문의 후일담에 초점을 맞춥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도장을 열고, 새로운 제자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적을 만나 다시금 영춘권의 위력을 세상에 알린다는 줄거리의 [엽문 2]는 장소와 인물만 변했을 뿐 전편과 쏙 닮은 구조입니다. 닮은건 좋은데 지나치게 닮아서 문제죠.

뭐랄까요, 그렇기 때문에 [엽문 2]는 참신함이 떨어집니다. 전편이 기존 무술영화의 틀안에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격조높은 퀄리티로 특징을 이룬것에 반해 이번 작품은 1편의 장점에 너무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전편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던 홍금보가 이번엔 전면에 등장해 노익장을 과시하며 비중있는 역할을 맡고 있어 신구세대의 고수들이 1:1로 맞붙는 볼거리를 연출합니다만 저러다 협심증으로 실려나가는게 아닐까 걱정될 만큼 오히려 금보형님의 액션연기는 부담스러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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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ndarin Films LTD. All rights reserved.


또한 보스 캐릭터로 등장하는 서양인 복서는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오버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즘에야 이종격투기가 보급되어서 거부감이 덜하긴 합니다만 영춘권과 복싱의 대결이라는 컨셉 자체가 1편에서 일본:중국의 대결구도를 써먹었으니 이번에는 영국:중국의 대결로 해보자고 무리하게 갖다붙인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리고 복서 역할을 맡은 서양배우의 연기는 완전 꽝이에요. 전편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짧은 러닝타임과 드라마적 요소의 부족이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그런 드라마적인 재미가 대폭 줄었는데다 그마저도 단순해져 버렸습니다. 마치 [엽문 2]를 보고 있노라면 저 멀러 소련까지 날아가 적대국의 챔피언을 때려눕힌 [록키 4]가 연상됩니다.

다행스럽게도 견자단만큼은 역할에 충실합니다. 이제서야 빛을 보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어느덧 궤도에 올라선 안정된 연기력과 더불어 절정의 기량에 달한 액션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아.. 정말 그의 몸동작 하나하나에서 품위가 느껴집니다. 이연걸이라는 배우가 [황비홍]을 통해 소림사 청년의 이미지를 벗고 사부로서의 연기변신에 성공했듯, 견자단에게는 바로 이 엽문이라는 캐릭터가 딱 제격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대했던 이소룡의 일화는 영화를 보시면서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기회가 되면 다른 글을 통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고 싶습니다만 실제 엽문이 이소룡을 제자로 삼은건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였습니다. 엽문의 중장년 시기를 그리고 있는 [엽문] 3부작의 기획에 있어서 아직 이소룡이 등장할 시기는 아니라는 뜻이지요. 따라서 이야기의 구조상 (적어도 2편까지는) 이소룡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뭐 어찌되었건 [엽문]이라는 작품 자체가 그리 사실성을 강조한 영화는 아닌지라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만요.


P.S:

1.전편의 악당, 금산조로 나온 번소황의 재등장은 반갑기도 하면서 한편 웃음을 자아냅니다.

2.어차피 헐리우드에서 악당으로 종종 출연한거 3편에선 이연걸이 메인 악당으로 등장하는건 어떨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봤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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